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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들

시골 집 마당
부친께서는 농촌 젊은이들을 계몽하고 신앙으로 양육해야 나라의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결국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기 전에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그것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 영적 황무지에서 마치 맨 땅에 헤딩하듯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시골집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오려면, 먼저 시외버스를 타고 김포읍까지 가서, 가끔 출발하는 강화 방향 버스를 한참 기다려야 했습니다. 몇 정거장을 지나 있던 마을 입구에서 내려 한참 걸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눈앞에 펼쳐지던 마을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이 아름다웠습니다. 저 멀리 병풍을 친 듯 보이던 낮은 산 앞으로 논과 밭이 넓게 펼쳐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굽이굽이 길게 뻗어있는 길을 따라 한참 걸어 들어가면 산과 맞닿는 곳에 우리가 살던 집이 있었습니다. 대문 옆에 있는 자그마한 사랑채를 빌려 개척을 시작한 것입니다.

주인 할머니께서는 부지런하시어 항상 무엇인가 분주하게 집일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유난히 넓은 마당을 아침저녁으로 빗질 하시면서 깨끗하게 관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잘 모르지만, 그 마당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야단치는 할머니
그 당시 저와 친구들은 아침에 밖에 나오면 아예 저녁까지 하루 종일 함께 놀았습니다. 시소와 철봉과 같은 현대식 놀이기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에게는 온 세상이 무료 놀이동산 이었습니다. 여름이 가장 좋은 계절이었지요. 개울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다가 가재와 작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길가에 널려있는 과일과 야채를 서리해 먹었습니다. 뒷산에 올라가서 나뭇가지로 온 몸을 군인으로 변장하고 전쟁놀이를 하였습니다.

저희 집 마당은 친구들이 즐겨 찾는 곳 중에 하나였습니다. 땅 따먹기와 비석 놀이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땅 따먹기는, 커다란 원을 그려 놓고 그 안에서 자그마한 돌을 사용해서 내 땅의 영역을 가장 많이 넓힌 사람이 이기는 놀이였습니다. 비석 놀이는, 손바닥 크기의 돌을 비석처럼 세워놓고, 마당 건너편에 한 줄로 서서 몸 부위에 올려놓은 채 걸어가서 쓰러뜨리는 놀이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 놀고 있던 우리에게 아주 가끔 날벼락이 떨어지곤 하였습니다. 마당을 애지중지하시는 집주인 할머니께서 빗자루를 들고 쫒아 나오시면서 혼을 내셨던 것입니다. 다른 곳에 가서 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평상시에 그 할머니는 너무도 인자하시고 웃음이 많으셨던 분이셨습니다. 매우 너그러우셨던 분이셨는데, 이상하게도 마당을 파거나 깊은 금을 거리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습니다.

이미 동네 형과 누나들이 그 할머니를 “야단치는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자연히 우리들도 그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지요. 그 분의 존함이 무엇인지 들어본 기억조차 없습니다. 사실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 분은 우리가 마당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야단을 치는 할머니이셨습니다.

이야기 꽃
대학교 1학년 때 그 시골집을 처음 방문하였습니다. 어려서 떠난 뒤 항상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있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야단치는 할머니를 무척 뵙고 싶었습니다. 집안이 항상 청결하고 정돈되어야 직성이 풀리시는 깔끔하신 분이셨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과거를 회상하며 마을 입구에 한참 앞을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아직 도시 개발을 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몇 채의 신식 빌딩이 세워져 있었어도 대부분 과거의 모습 그대로 있었습니다.

혹시 할머니께서 이사를 가셨거나 돌아가셨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큰 소리로 “할머니~” 라고 불렀습니다. 잠시 후 방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셨습니다. 연세가 많아 몸이 불편해 보이셨습니다. “누구신가?” 할머니는 저를 알아보지 못하셨습니다. 사실 코를 질질 흘리고 다녔던 어린 시절 마지막으로 저를 보셨으니 알아보지 못하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저도 처음에는 할머니를 잘 알보지 못했습니다. 눈에 띄게 많이 늙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 만났다면 전혀 알아볼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할머니, 저 진모예요. 기억나세요? 오래전에 여기에서 살았잖아요!” 할머니께서 저를 잠시 바라보시더니 생각이 나셨나 봅니다. “아니, 니가 진모니?” 울먹하시며 제 손을 덥석 잡아주셨습니다. 방에 들어가서 할머니께 큰 절을 올렸습니다. 가까이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풍성하게 피우며 행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음의 고향
한참 시간을 보내고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장롱을 열어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으셨습니다. 이불과 요 아래 숨겨놓으셨던 하얀 천으로 돌돌감은 자그마한 꾸러미를 꺼내셨습니다. 방에 앉으셔서 조심스레 푸시더니 그 안에 있던 현금을 제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사실 그 날 할머니께서 제게 건네주신 금액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아주 작은 지폐 한 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날 평생 마음에 남을 큰 것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소중한 것을 나누고자 하셨던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장롱 깊은 곳에 꼬깃꼬깃 접어 숨겨두었던 지폐를 꺼내실 때의 즐거운 모습과 제 손에 쥐어주실 때의 사랑의 눈길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몇 년전 다시 그 곳을 방문하였습니다. 신도시 개발로 인해 새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되어, 옛날 시골의 모습은 아직 제 마음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고스라니 남아있는 좋은 추억과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무엇이냐에 따라 현재 삶의 질이 결정될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