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담임목사님 칼럼, 웹매거진

지혜로우십니까?

지혜로우십니까? 

지혜의 가치 

솔로몬 왕을 기억하시죠? 하나님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소원을 물으셨습니다. 그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만일 여러분도 같은 질문을 받으신다면, 무엇을 요청하시겠습니까? 평상시 마음에 담겨있는 내용을 말씀드리겠죠.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급히 전달하려 하시겠죠. 혹시 그 소원이 지혜이십니까? 아니면 지식, 재물, 또는 명성이십니까?

자신이 성취하려는 목적이 분명하면 시간과 재물을 희생하는 것을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람으로 여기고 잘 참아냅니다.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수많은 장애물을 통과해야 하지만, 위축되지 않고 이겨내면서 한 길을 걸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지혜입니다.

저는 요즘 ‘지혜의 가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살아있는 스승입니다. 옛 스승이나 부모님의 가르침을 지혜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읽은 책을 통해 만난 대부분의 훌륭한 분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큰 교훈도 지혜입니다.

지혜는 지식을 통제하는 능력입니다. 많은 것을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부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지혜는 이미 얻은 엄청난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결정하게 합니다. 지혜는 최첨단 기술을 삶에 적절하게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삶의 패러다임을 혁신시키고 한 시대의 문화를 주도하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의 상실

이 시대는 지혜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많은 것과 높은 곳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수저 계급론’을 아십니까? 전문적인 학자들이 만들어낸 이론이 아닙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인터넷을 통해 이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꼬집는 냉소적인 놀이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그리고 흙수저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부모들의 경제력을 말합니다. 경제 양극화의 아픈 현실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금수저는 부유한 집안, 반대로 흙수저는 가난한 집안을 가리킵니다.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도 열심히 노력하면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습니다. 저도 주위로부터 자신의 환경을 이겨낸 인간승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습니다. ‘수저 계급론’이 무엇을 지적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가진 자들이 벽이 너무 두텁고 높아서,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아예 꿈을 이룰 수 없거나, 오로지 부분적으로만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런 슬픈 사회의 현실이 만들어 낸 기형적인 문화가 있습니다. ‘한탕주의’입니다. 목적을 정당하게 이루기 위해 반드시 중요시 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적지까지의 과정입니다. 이와 반대로 한탕주의는 과정이 지닌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단번의 시도로 목적하는 크고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장담하는 크게 잘못된 태도입니다. 결국 ’한탕주의‘는 지혜를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지혜가 없기에, 목적을 바르게 설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과정 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길잡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습니다.

검은 생각 

‘한탕주의’는 땀과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대박을 터트리기 위한 길을 찾게 합니다. 이런 것을 ’꼼수‘라고 부릅니다. 정당하지 못한 비열한 방법과 수단을 말합니다. 남들에게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없기에, 자신 또는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소수들만이 공유하는 검은 생각입니다.

지혜의 자리를 ‘꼼수’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보통 사람’이라고 자칭한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이 터졌을 때, 온 사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액수가 얼마나 컸던지, 평생토록 만 원짜리 지폐로 셀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사회의 비리를 척결하는데 앞장서는 일로 유명해진 한 법조인이, 엄청난 액수의 뒷거래로 치부하였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런 예가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한탕주의’가 만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꼼수쟁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이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분개합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며 비판하는 목소리를 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현실이 우리를 웃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일단 일을 저지르고 난 후 얼마동안 마음고생을 하겠지만, 잘 이겨내면 결국 내 손에 들어온 엄청난 것을 누릴 수 있다는 유혹 때문입니다. 그 결과, 검은 마음의 영향력을 대항하기 위해 차단벽을 세우고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꼼수라는 카드를 꺼내는 것을 정당하게 생각합니다.

검은 생각을 지니게 되면, 자기 논리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 매우 힘들어집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본인의 생각과 방법을 정당화합니다. 꼼수를 이루기 위해 더욱 치명적인 꼼수를 궁리하게 되고, 목적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점점 지혜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검은 마음은 ‘흑백논리’를 최우선으로 둡니다. 물론 언제나 검은색이 옳다고 주장하지요.

 

지혜의 회복

지혜의 상실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계명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리라 (잠언 10:8)

지혜의 회복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성경은 지혜의 샘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일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이 세상을 어둡게 하는 세력을 물리치는 힘입니다. 지혜의 회복은 곧 영광의 빛을 빠르게 회복하는 길입니다.

“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잠언 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