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몇 일전, 개인 경건 시간에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 만 따라 가도다..“라는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묵상하면서 부르니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새삼 깨닫고 감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몫으로 허락하신 십자가를 주님처럼 적극적으로 지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마다 ‘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순절은 십자가의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특히, 재발견한 ‘나의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순종하는 자세로 신앙의 길을 걸어갈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끔찍한 사건
십자가에 대한 묵상을 하다가, 문득 지난 2011년 한국 문경에서 있었던 끔찍한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엽기적인 사건이 십자가와 연관이 있었습니다. 50대 후반의 한 남성이 인적이 없는 폐쇄된 채석장 한 곳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모습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죽음과 유사하였다는 것입니다. 속옷만 입은 채, 머리에는 가시관을 썼고 양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있었습니다. 심지어 허리에는 무엇엔가 찔린 상처가 있었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경찰의 수사 결과,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타살의 흔적이 없다는 점과 평상시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서 죽으려 했다는 사실을 주변사람들을 통해서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끔찍한 사건의 주인공이 ‘십자가’를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가 진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드린 것입니다. 자신도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죽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가 혼자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도와달라고 간청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을 신앙의 절정으로 삼았던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자학의 십자가
로마 가톨릭이 인구의 80% 정도가 되는 필리핀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매년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고난 주간의 절정인 성 금요일, 즉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에 맞추어 몇 사람의 손에 못을 박은 후 십자가에 매달아 놓는 일종의 재연 행사입니다. 가톨릭 성도들과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이 이 장면을 눈으로 목격하기 위해 장사진을 이룹니다. 요즘은 특종 해외토픽인 이 끔찍한 장면을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생살을 찢고 뚫는 고통을 참아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나도 십자가에 못 박히겠다는 것이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무지와 오해로 무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형벌을 받아 죽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이 완성되었기에,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려하거나 고통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성 금요일에 필리핀에서 들리는 못을 박는 망치소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들은 ‘자학’을 통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해하고 기대하는, 십자가에 처형을 받음으로 얻는 유익은 매우 인간적입니다. 자신의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 것은 기본이고, 질병에서 치유를 받고 마음의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이 십자가의 고통을 이겨냄으로서 자신의 가족이 병에서 나음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반복적으로 이 행사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들만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등을 채찍으로 사정없이 때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세게 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들입니다.
헛된 영광의 십자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루터는 이런 행위를 보고 무엇이라고 하였을까요? 그들이 ‘영광의 십자가’를 추구하고 있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영광의 십자가’는, 보통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뒤 삼일 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루터가 말하는 ‘영광의 십자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거룩한 행위 또는 자신의 공로를 앞세우려는 태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과 같이 극단적인 행위의 근본적인 동기는, 인간의 힘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은 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신앙의 뿌리는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의 전적인 은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힘을 내십시요!
우리는 사순절을 맞아 계속하여 십자가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연스럽게 ‘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
신앙인 모두에게 ‘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수반되는 모든 어려움을 가리킵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제대로 믿으려면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합니다. ‘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모습을 모방해서 죽는 행위나 생살을 찢으며 고통을 느끼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특히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인정을 받으려는 태도로 ‘자학’하는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나의 십자가’는 영적 어두움이 짙게 깔린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신앙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주어진 신앙의 길에서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묵묵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나의 십자가’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십니다. 넉넉히 지고 갈 수 있을 정도의 무게만 얹혀주십니다. ‘나의 십자가’에 우리를 신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