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대상
지렁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생긴 모양부터 징그럽습니다.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그렇다고 지렁이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저입니다. 제게 지렁이는 거부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려서 살던 시골에 놀러갔다가 매우 충격적인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지내던 몇 명의 친구들과 선배 형들이 함께 낚시를 가기로 했습니다. 낚시밥을 위해 지렁이를 잡기로 했습니다. 기름진 땅이 어딘지를 생각하다가, 삽으로 돼지우리 옆을 파보았습니다. 두 번째 삽을 뜨는데, “끄악!” 못 볼 것을 보았습니다. 삽에 몸이 베어 반 토막이 된 통통한 지렁이가 괴롭다는 듯이 꿈틀거리며 징그러운 액체를 뿜어냈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던 대낮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적나라한 모습이 단번에 제 머리에 동영상으로 저장되었습니다. 물론 후로 제 꿈에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지렁이를 낚시 밥으로 사용해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만지는 것은 물론 가까이 보는 자체가 공포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저는 비가 오는 날이 되면 남모르는 고민에 시달렸습니다. 비가 그친 다음날 길가에 축 늘러져 있는 지렁이들 때문이었습니다. 징그러워서가 아니라 두려워서였지요. 항상 피해 다녔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남에게 속마음을 이야기를 하면 즉시로 놀림을 받을까봐, 말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불편한 진실
토룡탕을 아십니까? 중년들의 혈액 건강에 좋다는 보양식입니다. 동의보감에도 지렁이가 이뇨 작용과 해열에 효과가 있다고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지렁이를 탕 또는 가루로 만들어서 먹습니다. 사실 처음 토룡탕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그저 우스갯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몸에 좋다고 하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잡아먹는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지렁이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미국에 와서 세탁소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비록 고된 육체노동이지만 감사하게 생각해야겠다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미국 디트로이트와 캐나다 토론토 중간 정도에 런던이란 도시가 있는데, 그곳으로 이민가신 분을 만나 끔찍한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곳 많은 교민들이 아침 일찍 잔디밭으로 나가, 컵과 젓가락을 양손에 들고 지렁이 잡는 일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무슨 영문인지 되물었습니다. 캐나다에 있는 화장품회사에서 원료로 쓰기위해 많은 양의 지렁이를 구입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나도 어쩔 수없이 지렁이를 잡아 돈을 벌어야 했다면… 이란 생각이 드는 순간, 제 마음을 힘들게 하던 불평거리가 사라졌습니다.
이 일을 통해 알게 된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여성분들이 입술에 바르는 립스틱 원료 사용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지렁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전혀 상관이 없지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립스틱을 칠한 여성의 입술을 보기가 민망스러웠습니다. 립스틱 외에도 지렁이가 화장품에 많이 사용된다고 것을 근래에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레 혹시 남성 화장품에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알아보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지렁이의 아픔
한국은 도시화가 되면서 맨 땅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시멘트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잔디와 녹지가 많은 미국에서는 땅을 밝을 수 있는 기회가 많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다릅니다. 비가 온 뒤 길 위에 널려져 있는 지렁이 때문입니다. 다시 땅으로 기어들어가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면, 아예 땅 속에서 나오질 말지, 비가 뭐 그리 좋다고 밖으로 뛰쳐나오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렁이가 땅에서 기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머리가 따로 없기 때문에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비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렁이는 피부로 호흡을 하기 때문입니다. 비가 많이 내려 땅속까지 물이 고이면 지렁이가 물속에 잠겨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숨쉬기 위해서 땅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강이 범람하고 심한 홍수가 나면 재빨리 재해지역을 떠나가야 하듯, 지렁이도 살기 위하여 그 자리로부터 도피하는 것입니다.
물을 피해 나온 지렁이에게 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다시 땅으로 기어 돌아가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들짐승과 새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접한 뒤, 비가 온 뒤 길거리에 누워있는 지렁이가 가엽게 보였습니다. 아직 징그럽고 두려운 상대라는 근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물로 인해 호흡을 할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땅으로 기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아픔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렁이 인생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실, 지렁이가 신발에 밟혀 꿈틀거리는 것을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한 마디로, 초등학교 4학년의 충격의 재현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속담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자연생태계의 먹이사슬이란 순환 속에 살아가는 연약한 지렁이도 생명체이기에 반드시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항상 무방비 상태로 당하고 살아가는 상대를 끝까지 깔보고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충고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