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운전 중에도 전화 통화가 가능합니다. 물론 전화기를 손에 들지 않아도 됩니다. 차에 부착된 라디오의 기능이 향상되어, 핸드폰을 간단한 방법으로 블루투스(bluetooth)를 통해 연결시키면 됩니다. 소형 마이크가 운전자석 위에 부착되어 있고, 스피커로 상대의 소리가 들립니다. 심지어 핸드폰에 저장된 상대의 이름이 그대로 라디오 스크린에 나타납니다.
어느 날 운전 중에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마침 어떤 목사님께서 제 차를 타셨는데, 통화를 마친 후에 저를 놀리시며 크게 웃으셨습니다. 어리둥절해서 웃으시는 이유를 여쭈었습니다. 라디오 스크린에 나타난 “엄마”라는 글자를 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엄마”는 제 핸드폰에 저장된 어머니 전화번호입니다. 언제지 모르지만 아주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사용한 호칭입니다. 저는 3남매 중 막내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응석도 많이 부렸지요. 공석에서 “어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해야할 경우가 있습니다. “엄마”라고 부르는 것처럼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아무쪼록 전화 통화의 첫 마디는 한결 같습니다. “엄마!”
“엄마, 사랑한다!”
‘세월호’에 대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온 나라가 우울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커다란 사건이었지요. 꽃다운 나이에 활짝 펴보지도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배가 침몰하는 순간에 배 안에 갇혀있던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핸드폰을 이용해서 부모들에게 보낸 영상 또는 문자가 공개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순진한 아이들답게 상황을 이해하고 재미있게 즐기는 듯 했습니다. 점차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면서 절박한 상황을 알렸습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였을 때, 그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려 차마 다시 볼 수 있는 용기가 없습니다.
“엄마, 내가 말 못할까봐 보내놓는다. 사랑한다!” 깊고 차가운 물속에 빠져들기 전에 한 학생이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입니다. 아마 짙은 어둠 속에서 차가운 바닷물이 몸에 차오르는 순간에, 죽음을 현실로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아이들의 마지막 절규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무어라 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분명 이 한 마디였을 것입니다. “엄마!”
“엄마, 고구마!”
양로원을 방문할 때 문뜩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시카고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부터 일주일에 하루씩 양로원에서 자원봉사를 한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오래전부터 하고 계시던 일을 저도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양로원 좋은 시설과 운영 시스템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80년대 초, 한국은 사회 복지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을 때입니다. 특히 어르신들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을 때였지요.
한국은 전통적으로 대가족제도를 중시하였습니다. 3대가 한 지붕 아래 살면서 한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를 유지해 온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온갖 즐거움과 갈등을 경험할 수 있던 곳이었습니다. 요즘은 이와 반대인 핵가족제도, 즉 출가하거나 그 연령이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살아가는 형태가 대세인 듯합니다.
핵가족제도는 산업의 발전의 결과물입니다. 공부와 직장으로 인해 부모를 떠나 먼 곳에 가정을 꾸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지요. 미국은 한국에 비해 산업 발달이 훨씬 앞서 시작된 나라였기에, 핵가족의 형태 역시 일찍 시작된 것입니다. 양로원은 핵가족제도로 인해 생겨난 산물이지요.
“엄마, 고구마!” 얼마 전, 양로원 복도를 걸어가다가 휠체어에 비스듬하게 누워계신 한 할머니께서 저를 보시며 던지신 말입니다. 제가 분명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습니다. 그 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시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엄마, 고구마!” “엄마, 고구마 갖다 주세요!” 큰 목소리로 또렷하게 반복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더 이상 발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할머니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홀쭉하시고 피부가 고운 할머니셨습니다. 그 분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저를 보시더니 조용히 “엄마, 고구마!” 를 반복하셨습니다. 저를 쳐다보시는 할머니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셨습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분은 치매에 걸리셨음에 분명합니다. 손자는 물론 증손자도 여럿 두셨을 것 같은 연세에 ”엄마!“를 애타게 찾고 계셨습니다. 과거의 모든 기억이 지워진 상황이지만, 결코 가슴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 그 한 분, 평생 힘들고 기쁠 때 먼저 생각났던 그 한 분, “엄마!” 를 찾고 찾았던 것입니다.
“엄마, 고구마!” 그 할머니의 어머니께서 밭에서 키운 고구마를 맛있게 먹은 좋은 기억 때문인지, 6.25 전쟁 이후 가난한 시절에 어머니가 구워주신 고구마가 평생 감사해서인지, 무슨 영문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은 그리움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시장에 가면 가득 쌓여 있는 고구마가 아니라, 먼저 세상을 떠나가신 한 분 밖에 계시지 않는 그 분, “엄마!” 이시지요.
“엄마, 나야!”
저는 아직 엄마가 살아계신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대로 효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엄습해왔습니다. 마음을 달래느라 오랫동안 글쓰기를 멈춰야 했습니다. 항상 그 곳에 계실 것 같았는데 몸도 마음도 약해지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 엄마 같지 않은 모습에 가슴이 저려옵니다. 매해 5월 이면 돌아오는 어머니 날, 처음으로 혹시 올해가 마지막이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마치기 전,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엄마, 나야!” 그냥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드렸다고 말씀드리고, 인사한 후 끊었습니다. 언젠가 상대도 없이 허전하고 쓰린 마음으로 허공을 향해 부를 수밖에 없는 시간이 오기 전에, 더욱 자주 다정스레 불러볼 것을 다짐해 봅니다. “엄마,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