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해
1980년은 제게 잃어버린 한 해였습니다. 이른 봄부터 ‘3김 시대’로 시작된 정치적 혼동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총체적인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이었던 저는 그 당시 신문 기사들과 TV 뉴스를 의심 없이 믿고 있었습니다. 제가 워낙 어리숙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웠었기 때문이었지만, 철저하게 통제된 사회 환경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요.
2학년을 시작하면서 이젠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각오가 있었지만, 계속되는 데모로 인해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질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휴강 소식이 왜 그리 달콤하였는지요. 친구들과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찻집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재미가 제법 솔솔 했습니다. 아예 종일 휴강한다는 공고가 붙어있을 때에는, 아예 친구들과 함께 머리를 식힐 겸 학교 근처에 있던 기차역에서 시외선 열차를 타고 바람을 쐬러 나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휴강이 잦아지면서,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 등록금을 받쳤으니 수업을 받을 권리가 있다며 본전 타령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아침마다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캠퍼스에 와서 무의미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에 대한 회의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피를 지닌 한 젊은이로서 간헐적으로 데모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전경들에게 곤봉으로 얻어맞고 투박한 구두에 짓밟힌 뒤 피를 흘리며 끌려가는 처참한 모습을 뜯어 말리다가 함께 끌려갈 뻔했습니다. 모든 것이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1980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 중에 사회 초년생이었던 제가 잃었던 가장 소중한 것은, 사회에 대한 신뢰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었지요. 사회 전체가 그 어는 것으로도 깰 수 없는 두꺼운 벽으로 쌓여 있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무엇인가 큰 손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를 각성시키고 눈을 뜨게 하였던 모든 것들이 사실이었습니다.
나름의 의미를 찾아서
그 시절, 밝고 신선해야 할 캠퍼스가 항상 칙칙해 보였습니다. 그 안에의 건물과 도로, 잔디와 나무 그 어느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학생들의 마음 상태가 어둡고 짙었다는 것이겠지요. 물론 이런 환경을 이기고 앞날을 대비하며 도서관에서 밤낮 책과 씨름하고 영어 학원에 다니면서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창 꿈에 부풀어 있어야 할 대부분의 대학생들에게 캠퍼스는 끝없는 방황의 공간이었습니다.
이렇다 할 즐거운 일이 없었던 대학생들은 나름의 의미를 찾으려 하였던 것 같습니다. 갑자기 학교 앞에 오락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습니다. 심지어 책방도 문을 닫고 오락 기계를 드려놓는 말되 되지 않는 일이 생겼습니다. 어떤 이는 자연을 찾아 나서기도 했습니다. 잠시라도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었겠지요. 남몰래 금서를 탐독하면서 생각의 틀을 정리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방법은 달라도 목적은 한 가지였지요. 현실을 탈피하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의 관심거리가 있었는데, ‘대학 가요제’라는 프로그램입니다. 아마추어 대학생들이 곡을 만들고 직접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경연대회였습니다. 항상 사회에서 버려진 자들로 인식되었던 대학생들에게 나름의 자부심을 선사해주었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결국 기성 가수를 꿈꾸는 사람들이 출연하기 시작하면서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관심 밖의 일이 되었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대단히 강한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77년도에 시작하였으니, 1980년에는 4회가 되던 해였습니다. 저는 유행가보다 클래식 음악을 더 좋아했고, 노래들이 유치하다는 편견을 버릴 수 없었기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1980년 대학 가요제 노래가 담긴 레코드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 중 은상을 받았던 ‘연극이 끝나고 난 뒤’라는 노래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제목이 매우 특이했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평범한 제목이 아닙니다. 노래 자체도 독특하였지만, 무엇보다 제 관심을 끌게 한 것은 그 노래의 가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