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파인더 (행복을 찾는 사람들)
해피 파인더
‘해피 파인더’는 얼마 전에 읽은 포토 에세이의 제목입니다. 이 책에는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들이 찾아가는 작은 행복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사진과 글을 담겨져 있습니다. 이곳에 소개된 40명의 주인공들은 도저히 행복과 상관이 없어 보이는 처지에서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가난하고, 고독하고, 장애를 지니고, 죽음을 앞두고, 나아가서 밥벌이도 힘든 애처로운 삶이 그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해피 파인더’를 손에 잡자마자 금방 읽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소요된 시간은 몇 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읽고 또 읽고.. 같은 내용을 몇 번이라 읽었는지 모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때 마다 이전에 그냥 지나갔던 내용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실 저는 저자가 이런 방법으로 참된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제시할 것이란 기대하지 못했었습니다. 분명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름의 선입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피 파인더’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하는데 충분했습니다. 그 누구라도 그들을 바라볼 때 불행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이 저렇게 행복감을 누리고 있는데, 나는 어떤 태도로 지니고 있나? 라는 자책과 반성 이상으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의 길에 행복은 없다?
‘신앙인은 행복할 수 없다’는 이전에 읽었던 수필의 제목입니다. 한 신앙인이 성경에 제시된 삶의 모습의 전형을 반추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행복감이란 매우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 분의 글이 지적하려고 하는 행복감이란, 해 아래서 살아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 즉 남들 보다 더 많이 갖고 상대보다 앞설 때 얻는 성취감이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성도라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에 목을 매달지 않아야 한다는 한 메시지에 동감합니다. 신앙의 길에 행복이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행복을 거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은 행복할 수 없으니, 행복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지요. 행복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감정의 한 부분이기에, 마땅히 성도로서 추구할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그 과정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눈높이
글을 쓰기 전, 앞에 소개한 ‘해피 파인더’라는 포토 에세이를 다시 읽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가난과 고통에 찌든 삶 속에서도 천사의 미소를 짓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주는 교훈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읽을수록 감동이 더 해주었던 이 책은, 이번에도 역시 페이지 마다 행복을 찾는 사람들의 눈물이 나도록 정겨운 모습을 통해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들이 처한 형편과 사정이 달랐지만, 그 분들이 공유하고 있던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닌 그들의 지녔던 눈높이의 위치였습니다. 행복감은 나의 눈이 고정된 곳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탐스러운 열매가 달려있어도 어떤 방도로도 올라갈 수 없는 나무라면 그냥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결정이지요. 눈높이를 맞추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것은 결국 눈높이 맞추기에서 실패한 결과이었지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풍성한 것에 눈이 열렸더라면 은혜가운데 행복감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굴욕감과 자족
내 시선이 고정되어야 할 눈높이의 위치가 잘못 선정되었다면 결국 포기가 답일 수 있습니다. 이때 마음의 상태가 어떨까요? 강압적으로 포기하게 되는 경우라면 굴욕감을 느끼게 되겠지요. 이와 반대로 자신의 의지로 과도한 욕심을 포기한다면 자족을 누리게 되는 법입니다. 행복이란 결국 마음의 상태입니다. 저는 ‘해피 파인더’의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굴욕감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물론 작가의 노련미가 독자들에게 그런 느낌을 갖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글을 쓰기 전에 다시 보고 읽었던 바, 제게는 그 주인공들이 자족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