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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불러보는 아리랑

사순절에 불러보는 아리랑

조진모 목사

아리랑

아리랑은 대한민국의 대표 민요입니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작가미상의 노래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각 지방마다 자신들의 독특한 상황을 반영시킨 아리랑 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정선아리랑입니다. 어려서부터 음악 교과서에서 배운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노래를 부르면 뭔가 마음이 짠해집니다. 가사 내용이 사랑에 실패한 한 여인의 아픔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한 것이지요. 10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라는 표현은 상대를 저주하는 의도라기보다, 혹시 발병이 나면 상대가 자기에게로 돌아올 수 있다는 소원을 담은 듯합니다.

그러나 아리랑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노래는 국민 민요가 되었습니다. 2012년, 유네스코에 등재되었습니다.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만나서 함께 부를 수 있는 몇 안되는 노래 중에 하나입니다. 이민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함께 만나서 부르면 마음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아리랑은 우리의 정체성을 담은 우리의 노래입니다.   

  

아리랑(我理朗)

며칠전 지인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아리랑에 대한 글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리랑은 원래 참 뜻은 참 나를 깨달아 인간완성에 이르는 기쁨을 노래한 깨달음의 노래입니다. 아(我)는 참된 나(眞我)를 의미하고, 리(理)는 알다, 다스리다, 통하다는 뜻이며, 랑(朗)은 즐겁다, 밝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리랑(我理朗)은 ‘참된 나(眞我)를 찾는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불렀던 아리랑 노래말 가운데 “아리랑”은 어떤 뜻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예를 들어 노래를 부를 때에 의미없이 부르는 “랄랄라.. 나나나…” 정도인 줄 알았던 것이지요. 전달 받은 글 뒤쪽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었습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것은 나를 찾기 위해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의미이고,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곧 피안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의 뜻은 진리를 외면하는 자는 얼마 못가서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진리를 외면하고 오욕락(五慾樂)을 쫒아 생활하는 자는 그 과보로 얼마 못가서 고통에 빠진다는 뜻이랍니다.”

저는 아리랑이 이런 깊은 뜻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출처가 불분명하기에 혹시 어떤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래도 이메일에 설명된 내용이 사실이라고 간주하고 아리랑 노래를 불러보았습니다. 진리를 외면하지 말아야 고통을 면할 수 있다는 설명이 생각났습니다.

한국인의 한

아리랑을 부르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한국인의 독특한 ‘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이란 단어는 영어로 번역하기도 힘듭니다. 그만큼 한국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국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소리 나는 대로 ‘han’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분명이 가슴 안에 잠재되어 있지만 특별히 그것이 무엇인지 표현하기 힘든, 평상시에는 잊고 살지만 언제든지 다시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살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담겨있습니다.

아마도 반만년의 역사를 지내오면서 외세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따른 일종의 집단 우울증과 같은 증세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삶의 애환을 노래로 승화시킨 것이지요. 결국 아리랑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내 마음이 아픔으로 채워져 있다는 호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내 마음에 담겨있는 아픔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면서 자신을 누르고 있는 감정을 이겨내려 한 것이지요. 여러 명이 함께 모여 아리랑을 부르면 서로의 마음이 통하고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흑인 영가

이와 비슷한 것이 흑인 영가입니다. 미국에 노예로 끌려와서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마음에 ‘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들어간 다음에 자신들의 아픔을 승화시키며 흑인 영가를 불렀습니다. “위대한 아침이 올 것이다… 이 깊은 강을 지나가면.. 우리는 승리 할 것이다…  기도 할 때 마다 성령을 통해 내 마음이 움직이네..” 가사의 대부분은 현실을 넘어 소망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흑인 영가는 아리랑과 근본적으로 다른 노래입니다. 신앙의 고백이란 것이지요. 누가 마음에 담겨진 한을 풀어주느냐에 대한 답이 전혀 다릅니다. 아리랑은 스스로 또는 서로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흑인 영가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아픔을 대신 지고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현재의 경험하고 있는 삶의 무게에 눌려있는 우리의 아픔을 대신 져 주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부활의 찬양

사순절에 불러본 아리랑은 내게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발병이 나지 않기 위해 올바르게 살아야하는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잘 알고 있는 흑인 영가를 불러보았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사순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신 한 주간과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성금요일로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 힘차고 밝은 ‘부활의 찬양’을 부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