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기독교인입니다. 불교가 가르치는 윤회설을 믿지 않습니다. 모든 인생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는 오직 한 번입니다.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이란 가설은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정해진 ‘삶의 순환‘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통해 태어난 신생아는 성장기를 걸쳐 청년기, 장년기, 그리고 노년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나무는 시간이 지나면서 굵어집니다. 나무를 잘라보면 나이테가 보입니다. 이 나무가 얼마나 많은 추운 겨울을 견뎠는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지나온 삶의 흔적을 지닌 것이지요. 그렇다면 ‘삶의 순환‘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 흔적을 지니게 될까요?
청년기는 우리 삶의 중요한 분수령입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가장 강하고 아름답습니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청년의 몸과 모습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청년기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무단한 노력을 하여도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지만요.
역사 다큐멘터리를 시청할 때마다 그 누구도 세월의 흔적을 비껴갈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분명히 같은 인물인데, 과거와 현재의 대조되는 모습을 봅니다. 흑백 필름 장면에는 분명 너무도 멋지고 건강한 모습을 지니셨는데, 세월이 흘러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는 분명 같은 인물인데 많이 변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건강하였던 군인도, 유명하였던 배우도, 명성을 날렸던 학자도, 그 누구도 ‘삶의 순환’을 역행할 수는 없습니다.
겉 사람
성경도 ‘삶의 순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내용은,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고린도후서 4:16)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전과 달라집니다. 세월이 흘러도 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유지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바람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거울 앞에 가만히 서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찍은 사진을 바라보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자주 경험하는 일입니다. 머리에 흰머리가 늘어가고, 얼굴과 목에 주름이 늘어가고, 팽팽했던 피부가 많이 느슨해지는 것을 봅니다.
변하는 것이 단지 얼굴 모습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변합니다. 무리를 한 후에 한번 자고 일어나면 거뜬하던 몸이, 몇 날이 지나도 계속 무겁습니다. 움직이는 속도가 드려집니다. 기억력이 쇠퇴합니다. 쉽게 피곤을 느낍니다. 식사량도 이전 같지 않습니다. 개인에 따라 여러 가지 변화가 따르게 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을 느끼고 이를 인정하는 것은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내가 정말 대단했었지!”라는 생각은 잠시의 위로를 줄 뿐입니다. 때로는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혹시 건강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하는 우려도 생깁니다. “그냥 사는 것이 다 그런지!”라며 ‘삶의 순환’을 운명으로 받아드리지만, 사실 맘이 그리 개운하지는 않습니다.
속 사람
성경은 겉 사람과 대조하여 속사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속사람을 더욱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속사람이란,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자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속사람은 겉 사람이 경험하는 어떠한 환경과 상태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자아를 지킬 수 있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라는 선언의 의미는, ‘삶의 순환’을 통해 각 인생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통하여 삶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통하여 얻은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담아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의 길은, 끊임없이 세상의 세계관을 벗어버리고 성경적인 가치의 옷을 입으로 갈아입는 영적 훈련의 결과물로 채워져 있습니다. 분명 일반인들과 유사한 겉모습으로 ‘삶의 순환’을 지나가고 있지만,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무엇을 하며 지낼 것인지에 대한 답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기와 어르신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와 같아집니다. 현재 나이가 많이 드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거나 과거 그런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더욱 공감을 하실 것이라 생각 됩니다. 마치 어린 아기가 전적으로 엄마의 손에 의존하듯, 항상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는 혼자 밥을 떠먹지 못합니다. 누군가 옷을 갈아 입혀주어야 합니다. 대소변을 치워주어야 합니다. 옆에 누군가 있어주어야 안심을 합니다. 활동을 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누워있습니다. 피부가 연약해서 쉽게 상합니다. 속에 있는 생각을 제대로 전달할 수도 없습니다. 분명 어르신은 어린 아기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어르신들의 속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 마음의 깊이와 무게를 감히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는 인생의 모든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나아가서 젊은이들은 결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통찰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하물며 신앙을 지닌 어르신의 지혜와 통찰력의 우수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성경의 눈으로 보게 하셨습니다. 구원의 날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불변의 진리로 믿게 하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나그네요 이방인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 이 세상 끝 날에 일어날 일들을 열려진 영적 눈으로 분명하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다 사라져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하신 구원의 날과 그 후의 천국에서의 삶을 확신하십니다. 이 약속이 살아있는 소망으로 채워진 어르신들은 약해져가는 겉 사람의 상태를 바라보면서 크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 저는 제가 사랑하는 한 어르신을 옆에 바라보면서, 더욱 확신을 가지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12월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어린 아가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생각해 봅니다. 그 분은 말구유에 누우셨으나,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향해 오신 아기 예수를 어떤 마음으로 맞아드리고 경배해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받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새로운 인생에 대한 지혜와 통찰력의 출발점이었습니다.